유니버스가 필요한 이유② - 기술은 '유니버스'를 필요로 한다.
유니버스, 세계관. 이런 말들이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분명 우리를 둘러싼 커뮤니케이션 환경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상을 관찰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 가운데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널리 전파되었지만 우리에게 이렇다 할 삶의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섣부르게 또는 성급하게 정의내리고 진행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메타버스의 교훈은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제대로 정리되어 나타나는 무언가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여기서 한번 짚어 보겠다. 왜 유니버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였고, 어떤 필요에 의해서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두번째 글이다. 첫번째 글은 우리가 변했다는 점을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먼 미래를 보며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니버스가 필요한 이유① -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 유니버스가 필요한 이유② - 기술은 '유니버스'를 필요로 한다. (이 글) 유니버스가 필요한 이유③ - '유니버스'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
유니버스가 필요한 이유② - 기술은 '유니버스'를 필요로 한다.
인류가 만들어 온 두 개의 문명
인류는 다른 동물에 비해 좀 독특하다. 단지 자연에 적응하기 보다는 자연과 나를 분리시켜 인식하며 자연을 가공의 대상으로 본다. 우리는 자연과 인류를 분리시켜 도시를 만들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도 쾌적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우리를 지키고 있다. 도로를 포장하고, 다리를 만들고, 철도를 깔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물리적 거리를 좁혔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만든 ‘유니버스’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인류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바로 온라인 세상이다. 초기 인터넷은 전화 같은 통신 수단으로 인식되었지만 오늘날 인터넷은 통신 수단 그 이상의 개념이다. 인터넷의 세계에는 끊임없이 대량의 데이터가 축적된다. 처음에는 지식이 공유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우리의 개인 정보는는 물론 성향이나 취미, 인간 관계까지 들어와 있다. 텍스트로 된 정보가 주를 이루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네트워크와 저장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과 동영상 등이 글을 쓰는 것보다 쉬워졌다. 이 세계에는 각 지역의 공간적 정보까지 스캐닝 되어 올라와 있다. 공간 정보와 사람 즉, 인터넷 세계의 데이터는 인류가 만들어온 문명과 비슷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지구 위에 문명을 만들었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은 디지털 세계에 문명을를 구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부터는 편의상 우리가 사는 세계를 ‘아날로그 세계’로, 네트워크 안에 만들어놓은 세계를 ‘디지털 세계’로 부르겠다.
메타버스는 죽음과 부활
‘웹2.0’ 이라는 말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유행했던 개념으로 웹문서가 일방향성을 벗어나 인터랙티브한 매체로 바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뭐가 달라진 것처럼 꾸미는 대표적인 수사가 ‘2.0’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당시에 웹2.0은 현재의 4차 산업 혁명이나 메타버스 같은 개념처럼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다. 웹2.0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나 신간 코너에 즐비했고, 무엇인지도 모를 웹2.0을 도입하는 IT회사도 있었다. 한 예로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메인 화면에 업로드된 뉴스 기사 전문의 단어 하나 하나에 링크를 달아 검색이나 댓글을 달 수 있게 만들었다. 실수로 본문 단어를 클릭하면 엉뚱한 창이 뜨기 때문에 뉴스 본문에 마우스를 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결국 웹2.0은 소위 ‘키워드 장사’에 그쳤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키워드 장사의 경험을 한 우리는 4차 산업 혁명이나 메타버스라는 개념을 대할 때 매우 조심스러워 진다.
그런데 웹2.0은 과연 키워드 장사에 불과했을까?
웹2.0은 이미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거의 잊힌 단어였다. 하지만 단어가 잊히고 얼마 후 우리는 ‘인터랙티브한 웹문서’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트위터, 페이스북 등 현재의 소셜 미디어들이다. 이들은 인터넷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인터넷과 구분되어 불린다. ‘유비쿼터스’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키워드 장사였던 것 같지만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우리들의 이런 경험을 정리해보면 이러한 패턴이 보인다..
1) 어떤 개념이 등장한다.
2) 누군가에 의해 시도된다.
3) 시도는 실패하고 잊혀진다.
4) 개념이 잊힌 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성공한다.
먼저 1)번에서는 ‘개념적 정의’가 일어난다. 이 때는 학문적 성격의 개념만 존재한다. 그것이 어떤 실체를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새로운 개념이 나타났을 때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그 정의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이 개념을 기계적으로 구현하게 된다. 마치 메타버스를 3D 가상 세계 + 아바타(캐릭터) 정도로 이해하는 수준이다. (최근 '메타버스'를 표방한 서비스가 과거의 온라인 게임 등과 무엇이 다른지 결국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이렇게 2),3)번의 과정을 거치며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이후 기술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기업과 고객들은 조금씩 경험을 쌓게 된다. 그리고 4)번에 와서 누군가가 이것을 유용하게 실체화하여 세상에 퍼뜨린다. 이제 사람들은 현실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을 ‘경험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웹2.0의 개념적 정의가 인터랙티브한 웹문서였다면 경험적 정의는 소셜미디어가 된다.
이러한 교훈으로 봤을 때 우리는 4차 산업 혁명이나 메타버스와 같은 개념에 기계적으로 휘둘려서도 안 되지만 그냥 키워드 장사라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일단 이 개념들 자체는 접어두더라도 이 개념들이 가리켰던 방향은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가지 기술 특히 4차 산업 혁명의 범주에서 자주 등장했던 기술들을 검토해 보겠다.
AR기술은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이미 적용되어 있고 가장 보편적으로 우리가 경험한 것은 ‘포케몬 고’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우리는 AR하면 스마트폰 카메라 화면에 실제 환경과 가상의 물체를 섞어 놓은 것을 AR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경험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AR의 기능이 작동하려면 우선 컴퓨터가 현실 공간과 물체를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AR은 스마트폰의 ‘측정’ 앱인데, 이 앱으로 가구나 가전제품은 물론 인쇄물의 사이즈를 측정할 수 있다. 내가 측정하고 싶은 가구가 바로 나의 앞에 있든 멀리 있든 상당히 정확한 측정을 해낸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측정 대상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즉 컴퓨터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물체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것이다. AR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AR은 컴퓨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날로그 세계의 생김새를 인식하는 것이다.
VR은 AR과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VR전용 헤드셋이나 스마트폰 등의 기기로 시각, 청각, 촉각의 자극을 얻어 가상의 세계를 경험한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해오던 MMORPG 게임의 경험도 넓게 보면 VR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인식할 가상의 공간, 즉 디지털 세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VR은 AR과 반대 즉 아날로그 세계에서 디지털 세계를 인식하도록 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SF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AI를 친구로 여기기도 하고, 인간을 지배할 무서운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AI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나오는 개념이 ‘인간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대신해 글을 쓰고, 진료를 하고, 판결을 한다는 식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문자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는 AI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AI의 보다 중요한 속성은 AR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판단하는 것이다. 자율주행 자동차를 예로 들면, 우리는 운전을 할 때 인도에서 나의 차와 나란하게 달리는 전동 퀵보드를 보고 경계를 하는데 특히 전동 퀵보드를 탄 사람의 나이가 어리고, 운전 경험이 없어 보인다면 길의 질서에 익숙치 않으므로 갑자기 자동차 앞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율주행차의 AR은 옆에 있는 전동퀵보드를 인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전동퀵보드를 타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주의깊게 퀵보드를 운전할지, 위험하게 운전할지는 판단할 수 없다. AI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R이 인식하는 것이라면, AI는 판단하는 것이다.
로봇은 AI라는 개념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을 대신’하는 존재로 비춰져 왔다. 특히 인간이 하기 어려운 육체 노동을 대신하는 긍정적인 존재로, 또는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갈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많은 현장에서 로봇은 인간을 대신하고 있다.
이 로봇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동하는 인간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 듯 로봇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과 상호 작용하며 자극을 종합해 의식을 만들고, 의식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고 환경을 바꾼다. 또한 인간은 디지털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비슷한 건물이나 물체를을 디지털 세계에 만든다. 인간은 두 세계를 넘나들며 상호작용한다. 그렇다면 로봇도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아날로그 세계를 베이스로 하는 두 세계의 상호작용자라면 로봇은 디지털 세계를 베이스로 하는 상호작용자가 된다. 컴퓨터가 AR로 아날로그 세계를 읽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탐험하고, 변형시키는 상호작용을 하려면 물리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로봇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로봇은 AI가 판단한 정보를 토대로 두 세상과 상호작용하도록 하는 존재이다.
BCI는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 사이에 정보 교환을 하도록 하는 기술인데 위에 언급된 기술처럼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지도 않고 회의론도 존재한다. 기술 구현의 가부 여부를 떠나 윤리적 문제에 부딪히는 기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살펴볼 필요는 있다. BCI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위에 언급된 기술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과 이 세상을 인지하는 것은 두뇌에서 만들어진 의식 때문이다. 이 의식은 두뇌 속에서 전기 신호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0과 1로 만들어진 코드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고 판단하는 세상의 정보는 두뇌의 전기 신호로 만들어진다.
만약에 한 사람이 죽어서 두뇌의 모든 정보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여전히 이것은 기억이라는 데이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데이터에 AI가 적용되면 데이터 끼리 연결되고 분리되면서 비로소 ‘의식’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몸이 없어도 의식을 갖게 된다. 이 데이터에 기반해 자아가 생기는 것이다. 몸이 없고 의식만 있으니 매우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어차피 이미 디지털 세계 속의 의식이니 디지털 세계에 거주하면 된다. 어차피 우리 두뇌도 전기 신호로 세상을 느끼는 것이라면 디지털 세계 속의 우리 두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디지털 속에 구현된 보다 다양한, 예를 들어 용이 날아다니고 마법을 쓸 수 있는 세계에서 우리는 차갑고 뜨거운 것을 만지고, 배고픔과 포만감을 느끼면서 거주할 수도 있다.
두 문명의 통합이 방향이다.
비록 과장된 생각이지만 의미는 있다. 바로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생각이다. 4차 산업 혁명의 개념적 정의에서도 이미 이는 드러나 있다.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통합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세계의 통합은 결국 인류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인류를 영속시키는 것은 인류의 본질적 욕망이고 우리는 이것을 기술로 조금씩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술로 인류가 영속하는 모습은 우리 세대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술과 미디어의 발전 방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통합은 이미 전개되고 있다. 초기에는 O2O (online to offline)로, 지금은 메타버스라는 ‘개념적 정의’로 나타나고 있다. 두 세계를 통합하는 기술의 발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이 기술이 구현해 낼 ‘세계’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기술이 요하는 매력적인 세계는 아직 창작자와 마케터들에게 큰 기회로 남아있다. 즉, 기술은 세계를 필요로 한다.